기사 메일전송
성숙한 공동체는 건강한 논쟁을 즐겨한다
  • 김혜선
  • 등록 2017-10-12 11:26:20
  • 수정 2017-10-13 17:31:57

기사수정


▲ ⓒ 런던 김혜선 통신원


문화는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이 문화로 정착되려면 보편성과 편리성, 수용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고유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음식과 의복, 예의에 관한 것이다.


그중 한국의 한복은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몸이 조금만 불어나도 입을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인 현대 의복과 다르게 웬만큼 살이 쪄도 입을 수 있는 것이 한복이다.


외국에 살다 보니 한복을 입어야 할 일이 때때로 있다. 급할 때는 다른 사람의 한복을 빌려 입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웬만하면 거의 맞아 쉽게 몸에 맞추어 입을 수가 있다. 


수용성이 뛰어나지만 현대인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성 때문이다. 보편성과 편리성에서 배제되어 있는 불편함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곳에 그들의 문화가 있기에 낯설지 않게 된다. 지구촌은 보이지 않게 문화논쟁으로 우월성을 가리고 있다.


인간은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 논쟁은 다툼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자기표현이며, 다른 생각이나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검증하는 수단으로서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곳에서나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의 씨가 먹히지 않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대화가 아니라 논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논쟁은 양면성이 있다.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다투는 한 면과 발전을 위한 토론의 쟁론이 있다.


▲ ⓒ 런던 김혜선 통신원


정치를 해야 할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꺼리를 만들어 물고 늘어지며 상대방의 발목을 잡는 행위에 몰두 하면서 당쟁을 위해 싸운다고 한다.


인격을 존중하며, 건전한 주장과 칭찬도 하면서 심도 있게 토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논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국회에서 거의 매일 열리는 정치 토론의 문화는 더 나은 합일체를 찾기 위한 민주주의다운 바람직한 길을 가고 있다.


입장할 때는 서로 인사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서의 주장을 심도 있게 경청하면서 때론 야유도 보내지만 아낌없이 박수도 보내며 반대와 질문을 통해 서로의 주장을 검증하게 된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기도 하지만 인신공격에 치우치지 않고 그가 주장하는 쟁점에 대한 비판만을 하는 규칙을 두고 있다.


논쟁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토론 문화의 정점이다. 교회 공동체나 한국 정치인들은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밀어붙이고 인격적인 모독도 서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개인 문화든, 종교 문화든, 국가 문화든 서로 존중할 때 문화를 통하여 서로가 발전할 수 있으며, 파멸로 이끄는 문화 논쟁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성숙한 교회, 성숙한 국가는 논쟁이 발달되어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쟁론한다는 것은 서로가 평등해진다는 원리와 일치 되는 의미가 있다.


영국에서 빈번하게 듣는 단어가 있다. “쏘리”(sorry)다. 기침이나 재채기 할 때도 다른 이들과 어쩔 수 없이 부딪쳤을 때도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 할 때도 심지어 비가 내릴 때도, 그다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자주 입에 달고 다니며 쓰는 언어다. ‘미안하다’ ‘사과한다’의 뜻이지만 실제로 우리 어감만큼 미안한 감정과 사과의 뜻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정작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할 일이라면 반면에 쉽게 ‘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전이기도 하다. 


분명 자신들이 잘못한 일인데도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영국인의 가시적인 모습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일본과 비슷한 부분이 많기도 하다. 한국 정치인과 종교인들 사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악하고 영악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흔드는 뻔뻔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은 말을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발전적인 토론의 문화는 애당초 싹을 끊어 버린다. 


논쟁을 귀담아 들을 귀는 굳게 닫아 버린 채, 미숙아로 남아 제자리걸음으로 성숙한 쟁론이 발달할 수 없게 만든다.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동상(좌)과 윈스턴 처칠 동상(우) ⓒ 런던 김혜선 통신원


영국 하원 회의장으로 향하는 로비 양쪽엔 두 인물의 동상이 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이다. 각각 제1,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총리들이다. 


둘 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거인이었다. 하지만 성장 배경과 자라온 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처칠은 명문가 후손인 반면 로이드 조지는 그 반대였다. 


로이드 저지가 전쟁을 꺼려했고 마지못해 전시 총리가 되어 승리를 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상당기간 자유세계 지도자로는 유일하게 히틀러에 맞서 싸운 ‘전쟁광’이라 불리었던 윈스턴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지금도 그의 명성은 견고하다.


그런데 이슈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과거만큼 선명하지 않다. 정치를 해보지 않은 장사꾼이 정계에 진출하여 지금 한반도의 정세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세계 지도자란 모름지기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일도 그의 공과로 기록되는 무한 책임의 자리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은 심정이다.


[필진정보]
김혜선 : 안동교구 소속 런던 해외교포 사목 평신도이다. 런던한인성당 신앙의 길잡이 계간지 하상(구)편집인, 런던 특파원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