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안에서 복음(Good News, 福音)은 예수의 강생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다. 해방이요 구원이다. 새로운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다. 속죄제를 지내려면 성전에서 비둘기나 양이나 소를 잡아 바쳐야 하는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런 제사의 비용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세례자 요한의 요르단강 세례는 구약의 회당과는 달리 비용 없는 예식이었다. 많은 이들은 기쁜 소식에 요르단 강으로 나가 세례를 받았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요르단 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세례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내지 않고 제물을 바치지 않고 죄를 씻어 낼 수 있었다. 고비용의 성전제사가 아니라 비용 없이 속죄제를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짜뉴스의 시작
회당은 텅텅 비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요르단 강으로, 광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광야로 몰려들었다. 당황한 헤로데와 대사제 가야파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지만 예수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외치면서 ‘성전정화 사건’이라 불리는 예수의 복음이 울려 퍼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나 세리들의 강탈도 문제였지만 부패한 종교의 제사장들이나 대사제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민중들의 삶과는 너무나 괴리되는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보수세력인 대사제와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회당의 위기에 맞서 예수가 신성을 모독하고 로마에 반역한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대사제 가야파의 음모로 빌라도 앞에 끌려가 사형을 선고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성지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소리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나흘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친다. 무엇이 그들의 태도를 급변하게 만들었는가! 그건 지배자들의 ‘가짜뉴스’였다. 그들은 예수를 모함했고, 백성들의 여론을 발 빠르게 이용했다.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전적으로 헤로데와 대사제 가야파 쪽이었다.
대한민국 ‘언론’으로 나라를 바꾸다!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의 촛불이 부패한 정권을 끌어내렸고, 남북회담에 이은 북미회담으로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일렁인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언론이 있었다. 그것은 백 년 전통의 조선이나 동아, 중앙 등의 기성 언론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 언론이었다. 손석희와 김어준, 주진우와 김용민 등의 언론인이 기존의 언론문법을 파괴하며 사실을 직시하는 언론으로 국민들을 일깨웠다.
세상의 부정과 불의에 피곤해진 백성들은 오후 8시가 되면 < JTBC > 뉴스를 보기 위해 채널을 고정시켰고,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김필규의 팩트체크에 집중했다. 아침 출근길에는 < tbs >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진짜 얘기에 집중했다. 백성들은 식별했다. 어떤 말이 진짜인지 어떤 언론이 가짜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중·동은 국민들에게서 지탄받고, 손석희 김어준은 대한민국에서 종교인보다 더 신뢰받는 인물이 되었다.
새로운 언론은 선택하고 집중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질문이 세상을 바꾸었다. “#그런데 최순실은?” “#다스는 누구 겁니까?” 라는 질문에 전직 대통령들이 나란히 구속되어 법원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시기에 언론은 질문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그들의 어둠을 묵인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떤 방식으로 보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보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미디어의 힘이다. 언론은 묵시적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그들에게 불리한 것들은 외면했고 보도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이 외면당하고 감추어졌는가!
2014년 그들은 ‘세월호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공중파의 오보에서 시작하여 종편들은 일제히 유병언 구원파 이야기로 화점을 옮겨 난타를 치더니 세월호 부모들이 시체장사를 한다는 말부터 시작해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느니 대학특혜입학을 약속 받았다느니, 세금도둑이라는 등의 누명을 씌웠다. 가해자들은 언론이라는 동조자들과 함께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의 지지와 연대의 끈을 잘라내려 했고, 세월호 유가족 피해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왕따’시키려 했다. 그러나 파파이스의 김어준 총수는 질문했다. ‘배가 왜 침몰한 것인가?’ ‘왜 아이들을 적절하게 구조하지 않았나?’ 그의 질문은 다큐영화제작자 김지영 감독의 노력으로 얼마 전 ‘그날 바다’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세상에 공개됐다. 진실의 한 조각을 끌어올리며 그 영화의 말미에 김어준은 말한다. “이것이 나의 애도의 방식이었다”
그는 사회적인 대재앙과 슬픔 앞에서 문제의 진실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조사하며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죽은 이들을 위한 최선의 나의 행동, 실천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의 질문이 세월호를 뭍으로 끌어올렸으며 국민들이 두려움 없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결론을 내지 않고 질문했다. 왜 그런지,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성실한 질문들을 던지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집단지성의 힘을 기다렸다. 의식 있는 많은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운동에 동참했다.
가짜뉴스의 생산자는 누구인가?
가짜뉴스에 대한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가짜뉴스가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가짜뉴스를 언급하며 “가짜 뉴스의 확산은 (…) 정치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며 경제적 이익 추구에 이용될 수 있다”고 그 폐해를 지적한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가짜뉴스 제작자는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며 MBC 대주주였던 인물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 단식투쟁에 등장해 피자와 치킨, 맥주를 마시며 유가족을 조롱했던 시위자들은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자유청년연합’ 그리고 일베들이었다. 전경련은 30여 개의 극우보수단체에 70억 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삼성과 국정원의 작품이었다. 기존 뉴스는 이러한 저급 퍼포먼스를 제작하며 세월호에 대한 반대 국민여론도 있다는 뉴스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여론몰이로 그들을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로 몰고 갔다.
최근 남북, 북미관계의 급격한 변화와 평화에 대한 열망이 온 국민의 주요관심사다. 살얼음판을 걷는 이 와중에 < MBC > 김정호 기자는 “북핵 풍계리 취재 외신기자들 비자발급명목으로 1인 1만불 요구” < TV조선 >은 “풍계리 갱도 폭파 안해…연막탄 피운 흔적발견” 등의 뉴스를 양산했다. 그들은 모두 기성 제도 언론이었다. 가짜뉴스를 만드는 자들은 다름 아닌, 힘 있는 기존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국정원과 삼성이었다. 가짜뉴스의 생산과 유통에 대기업 삼성이 개입했다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언론사의 간부들과 국정원 법조인들 고위 공직자들이 삼성의 미래전략실 장충기 사장과 나눈 문자가 언론(시사인)에 공개되면서 국민여론조작을 위해 삼성이 상당히 많은 비용을 쓰면서 사회 전반을 두루 관리했음이 밝혀졌다.
교회 안의 언론, 종교 안의 언론
그런데 교회의 언론은? 종교 언론은 과연 어떤 모습 이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언론은 종교문제를 들추기 시작했다. 천주교 안에서 시작된 미투운동 뿐만이 아니라 대구 희망원 문제, 천주교대구교구의 재정비리 문제나 대구가톨릭대학의 재정비리 문제가 공중파를 통해 전파되었고, 인천교구 성모병원 문제는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추적 보도로 경영진이 은퇴하고 면직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개신교에서는 사랑의 교회,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 성추문이 < JTBC >언론을 통해 보도 되었고, 개혁의 길에 있는 < MBC > ‘PD수첩’을 통해 청정 조계종의 민낯이 드러난 ‘큰 스님께 묻습니다’ 보도는 불교 사부대중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을 들게 했다.
그런데 과연 종교의 언론기관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가? 대다수 종교기관의 유력한 언론들은 사회가 종교에 던지는 질문과 의혹에 대해 마땅한 질문은커녕 사실 자체의 언급을 회피했다. 그들은 침묵했고, 동조했고 언론의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한 종교언론 P 신문은, 요사이 교황의 ‘가짜언론’에 대한 말 한 마디를 잡고 가짜언론 타령을 하며 자신들이 진실한 언론임을 ‘식별’해 달라고 호소한다.
가짜뉴스는 과연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충주성심맹아원 12살 주희 죽음의 의혹에 대한 질문도, 선교지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인의 호소도, 대구희망원의 의혹도, 성가정입양원의 의혹도, 모두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는 자들이 만든 가짜뉴스라고 하지 않았나. 부모들이 터무니없는 보상을 요구하여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내부자들끼리의 말도, ‘자기가 좋아서 선교지까지 따라간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직면하지 않는’ 양심과 지성은 무엇에서 비롯되었을까?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성숙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나의 신앙은 의심이라는 화덕에서 구워져 나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교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변화하는 미디어 소통의 내용과 형식
소통방식이 급변했다.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도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일방적인 정보획득방식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방식, 마우스 ‘클릭’으로 더욱 정밀한 정보에 접근해 나간다. 소통방식 역시 이제는 일방적이지 않다. 쌍방향 시대가 열린 것, 수직이 아니라 수평 네트워크시대가 열린 것이다. 구령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명령하는 일방적인 소통은 국민들에게 외면당한다.
뉴스 생산자가 다변화 되고 다양화 되고 있다. 기존의 뉴스 생산자는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취재력과 전문기술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의 취재와 보도에 따라 편성되고 편집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뉴스, 미디어를 의심하고 비평한다. 그리고 직접 뉴스를 제작 유통시킨다. 그리고 정보의 객관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오히려 뉴스메이커들은 실시간으로 생산하거나 전파가 가능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쌍방향의 생생한 정보를 유통시킨다. 전파의 일방적 독점이 다양한 네트워크의 확산과 연결을 통해 쌍방향으로 고르게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시기 < KBS >, < MBC >, < SBS > 등의 기존 지상파 방송들에 대한 신뢰는 이미 무너져 버렸고 영리한 정보발굴자들은 다양한 ‘팟캐스트채널’과 ‘유투브’를 통해 더 정확하고 전문적인 정보에 접근하고 있었다. 지금 변화하는 시대 문제의 핵심은 ‘가짜냐 진짜냐?’ 하는 내용의 식별뿐 아니라, 매스미디어의 생산과 유통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불(火)은 양면성을 가진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화식(火食)을 한다는 것이 인류의 생존방식을 새롭게 재편했다.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물(H₂O) 역시 때로는 커다란 재앙이 되어 인간에게 두려움과 불안이 되기도 한다. 21세기의 온라인과 사회관계망 서비스 역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구다. 잘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다루면 커다란 해악이 될 수도 있다.
가짜 뉴스를 규제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미디어에 대한 개인의 비판의식을 키우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대중문화에 대해 단순한 소비자가 되기보다 비판적인 수용 능력이 강조되듯이 대중매체에 대해서도 비판 능력과 식별이 요구된다.
가짜, 진짜를 말하기에 앞서 기존의 언론들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불의한 시대, 부조리한 많은 사건들에 침묵했으며, 지금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 때문에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왜곡한다. 부끄럽지 않은 언론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난 시기 종교언론은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짓을 해왔다. 이제, 굿뉴스를 기대해 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이 글은 <공동선> 7,8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