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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영화로 보는 세상 : 미국, 공식적으로는 고문이 없는 나라
  • 이정배
  • 등록 2016-05-1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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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고문이 없는 나라이다. 고문은 법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고문으로 인한 자백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으며, 고문을 가한 이는 심각한 문책을 받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공식적이다. 더욱이 미국 내에서만 고문이 없다는 뜻이다. 미국의 관할권 내에 있는 국가들을 통해 미국은 여전히 고문을 집행하고 있다.


9.11 사건 이후 미국은 애국자법을 만들어 사전에 테러의 기미가 있어 보이는 이들을 감시하고 연행하여 조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문을 가하는 것이 좋다고 허락되지는 않았다. 부시 정부 시절에 이러한 규제를 넘어서기 위한 편법을 자행하는데 그것이 렌디션(Rendition)이다.


원래 렌디션은 국가 간 범인을 인도하는 국제적인 법을 일컫는 말이다. 법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한 이가 해당국가에 의해 붙잡혔을 때, 범인의 국가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할 목적으로 범인을 인도하는 것을 렌디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렌디션은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치국가를 자부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미국은 용의자를 붙잡아도 변호사의 입회 아래 심문을 해야 하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연금하여야 한다. 그러나 9.11 사건 이후 국가의 안보를 위한다는 목적 아래 법을 변용하기 시작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이 가능한 국가로 용의자를 이송하는데, 이런 짓을 렌디션이라고 일컫는다.


영화 ≪렌디션, Rendition≫(2007)은 캐나다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작품이다. 백인이 아닌 중동계라는 이유로 또는 이슬람권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유도 모른 채, 구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화학학자라는 이유로 테러사건에 도움을 주었고 배후 인물과 연락했다는 의심을 받아 체포된다.


미국 공항에서 붙들린 그는 미국 내에서 고문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로코로 이송되어 고문을 받는다. 고문을 통해 전화한 것을 시인하고 자기가 접촉한 이들의 명단을 써내려간다. 다행히 CIA 모로코 책임자가 양심적이어서 그를 탈출시켜 미국으로 돌아가게 한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는 여러 사람들이 극비밀리에 고문을 당하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정치권을 움직이고 고위층을 협박할 수 있었다. 만일 부부가 모두 중동계였다면 의원을 움직이는 일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비인권적인 일을 미국 영토 밖에서 자행하면서 미국이 세계 최고의 인권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이다.


우리나라 테러방지법에 촉각을 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법적인 기관이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편법적인 고문과 불법구금, 감시와 통제가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중삼중의 견제장치가 있고, 아직 언론이 살아있는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데 하물며 우리는 그보다 더 할 것이라는 염려가 매우 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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