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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가 되려면 땅을 넘겨야”
  • 최진
  • 등록 2017-11-22 12:42:17
  • 수정 2017-11-27 10: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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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위치한 미리내 성지는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주요 성지 중 한 곳이다. 한국 첫 방인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어서다. 김대건 성인의 어머니와 조선의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묘소도 함께 있다. 더불어 이 곳은 조선 후기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신앙촌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는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 미리내 성지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드러낸 선조 신앙인들의 거룩한 신심이 오늘날 신자들에게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교회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총이 가득해야 할 미리내 성지는 법적 분쟁 등으로 전쟁터가 됐다. 현재 미리내 성지 운영 주체인 수원교구는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 그리고 현 교구장 이용훈 주교까지 모두 미리내 성지와 관련해 법정 소송을 거쳤거나 진행 중이다.


어쩌다가 미리내 성지가 여러 불법 의혹과 소송 등으로 몸살을 겪는 땅이 됐을까. 과연 수원교구는 미리내 성지를 어떤 방식으로 성역화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김대건 신부 묘소를 지키던 

평범한 이들이 있었다"



▲ 대건 수도회 초창기 회원들


미리내 성지 관련 분쟁은 그 역사가 무려 40년에 이른다.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이뤄지면서부터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분쟁의 주인공은 성지 운영자인 ‘천주교 수원교구’와 미리내 성지에서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대건 기도원’이다. 1962년 설립된 대건 기도원은 교회가 미리내 성지에 관심을 갖기 전부터 이곳에서 성지의 기틀을 닦은 단체다. 


서울교구 관할 지역이던 미리내에 대건 기도원 설립자인 주금순 씨(이하 주 막달레나)와 신자들이 모인 것은 1952년이다. 이들은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지키며 평생 농사와 기도로 자급자족하면서 봉헌의 삶을 살자고 했고, 1962년 대건 기도원을 설립했다. 


당시 성인의 묘소는 공동묘지 가운데 하나의 무덤에 불과했다. 1928년 세워진 10평 남짓한 경당이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알리는 유일한 시설이었다. 묘지 주변은 밭과 논이었다. 주 막달레나와 신자들은 가진 돈을 모두 쏟아 김대건 신부 묘소를 중심으로 인근 토지 8,250여 평을 샀다. 


주 막달레나를 비롯한 신자들은 교회법이나 수도생활 규범 등을 잘 모르던 신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기도를 하며 살면 행복하겠다는 열망으로 신심생활을 지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염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도회가 되려면 

땅을 넘겨야 한다고 했다"



대건 기도원 설립 이듬해인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리됐다.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윤공희 주교는 교구를 돌아다니며 사정을 두루 살핀 후 대건 기도원 신자들에게 수도회 설립을 제안했다.


그는 가톨릭 공동체로 수도회가 되려면 수도생활 규범이 있어야 하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에 1972년 7월 21일 수원교구와 대건회는 ‘대건 수도회’가 되기 위한 합의서를 작성하고 가칭 ‘대건 수도원’ 창립을 준비하게 된다.


▲ 1972년에 이뤄진 천주교 수원교구가 대건 수도원(가칭) 측 합의서(자료제공=김풍삼)


수원교구는 대건회를 지도하겠다고 밝혔고 대건 기도원은 자신들의 부동산 명의를 교구 산하에 헌납하겠다고 했다. 또한 수원교구는 기도원이 진 채무를 책임지고 지급하겠다고 했으며, 향후 수도원 운영은 교구와 합의해 진행하겠다고 합의했다.


교구는 대건 기도원의 부동산 명의를 교구로 이전하라고 한 이유에 대해 ‘수도회 인가를 위한 절차’라고 설명했다. 수도회를 세우려면 재산과 사람, 그리고 수도회칙이 있어야 하는데, 재산이 개인재산으로 돼 있으면 수도회 허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의이전은 어디까지나 명의만 맡아두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대건 수도회가 설립되면 수도회 재산으로 돌려준다고 했다. 교구의 말을 믿은 대건회는 1972년 12월 30일 수원교구 재단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했다. 


이후 윤공희 주교는 대건 기도원을 대건 수도회라 부르며 1973년 2월부터 대천동 본당신부를 수도회 지도신부로 임명했다. 미리내 성지가 교회 안에서 유명해지자, 여러 수도회가 성지에 진출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윤 주교는 가장 먼저 미리내에 정착해 성지 땅을 지켜왔던 대건 기도원에게 우선권을 줬다.


김남수 주교, 미리내 소송 분쟁 시작


그러나 1974년 김남수 주교가 2대 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김 주교는 지도신부 파견을 중단하고 대건 기도원에 공동체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합의 된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고, 부동산 명의가 이전된 행정적인 결정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교구는 합의 내용을 외면하고 대건 기도원을 탄압하면서 1974년부터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임야 나무는 잘리고 농지는 광장이 됐으며, 하천은 수로가 옮겨졌다. 


토지용도변경 허가 없이 수로가 옮겨진 하천에서 폐기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는데, 교구는 폐기물을 그대로 다시 매립했다. 이 밖에도 농지불법점용, 불법건축물, 무허가 식당운영 등 여러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와 지역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대건 기도원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결국 소유권을 이전해준 지 2년여 만에 기도원은 농사짓던 땅을 잃었고 생계를 이어갈 수단을 모두 빼앗겼다. 그리고는 급기야 대건 기도원을 미리내에서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 명도소송을 벌였다.


성지가 소송 전쟁터로 변한 것은 김남수 주교로부터 시작됐다. 1974년 10월 5일 천주교 수원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남수 주교는 1980년 11월 4일 대건 기도원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 1980년 11월 김남수 주교는 대건 기도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자료제공=김풍삼)


김 주교는 대건 기도원 소유의 토지가 교구 명의의 땅이기 때문에 현재 사용하는 건물을 교구에 팔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 재산을 기도원 설립에 쏟았던 대건회 회원들은 미리내를 떠날 수 없었다. 소정의 보상금으로는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구가 기도원 이주비로 제시한 금액은 1,000만 원(현시가로 약 4,150만원 상당)이었다.


주 막달레나의 아들이자 현재 대건 기도원장인 김풍삼 씨는 “기도원 사정을 잘 알던 교구가 신자들을 건물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길바닥에서 굶어 죽으라고 하는 명령이었다”라며 “대건회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도원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민법에는 증여자의 재산상태가 현저히 변경돼, 생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경우 증여를 해제할 수 있다는 규정(제557조)이 있다. 그러나 수원교구는 미리내 땅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일반 사회에서도 법적으로 보살피는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돌보지 않았다. 


대건 기도원 신자들이 이주를 거부하자, 김 주교는 1984년 7월 6일 대건회 주금순 씨 등을 상대로 기도원 건물의 명의를 이전하라며 명도소송을 수원지방법원에 제기했다. 명도소송은 매수인이 대금을 지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유자가 부동산을 인도하지 않았을 때 벌이는 소송이다.


교구는 대건 기도원 설립 자금을 지원했던 고생금 씨가 교구 재단에 돈을 기증했고, 교구가 기증받은 돈으로 대건 기도원을 건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송이 진행되면서 교구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먼저, 교구가 자금을 지원했다던 고생금 씨 본인이 수원교구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고 씨는 공증문서까지 작성해 대건 기도원에 건네며 자신은 ‘대건 수도회 설립을 위해 재산을 기부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더불어 교구에 기증했다는 교구 측의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명도소송을 벌인 김 주교 본인이 1980년 대건 기도원에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기도원 건물의 소유권이 대건 기도원에 있다고 인정한 점도 법정에서 확인됐다. 4년 전 본인이 직인까지 찍어가며 인정한 건물 소유권을 느닷없이 소송에서 부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대건 기도원 설립이 수원교구 설립보다 앞섰다. 1963년 탄생한 수원교구가 1962년 완공된 기도원을 건립했다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더구나 수원교구 재단 설립은 더 늦은 1968년이다. 있지도 않은 재단이 돈을 기증받아 건물을 지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이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서야 승부가 났다. 교구는 소송에 이기기 위해 건축물대장을 부정사용 했고 기도원 건물을 교구 산하 건물로 바꾸려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또한, 교구청 직원이 법정에서 허위증언을 했고 공문서까지 부정사용 해 소송 사기미수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결국, 대법원은 1987년 6월 대건 기도원의 손을 들어줬다.



"교회와 싸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 미리내 성지 내 경당 ⓒ 최진


김 주교의 이 같은 행위에 대해 명예훼손과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주 막달레나는 ‘기도하기 위해 모인 신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교회와 싸워서는 안 된다. 아픔을 기도로 봉헌하자’며 적극적인 대응을 저지했다.


이후 교구장이 바뀌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1998년 9월 18일 김풍삼 대건 기도원장을 건축법 위반 혐의로 안성경찰서에 고발했다. 교구는 자신들의 땅에서 대건 기도원이 어떠한 승낙도 없이 축대 공사를 진행했고, 일부 기도원 건물은 건축법을 위반한 건물이라고 고발했다. 


그러나 법원은 교구가 고발한 사항들이 6년이나 지난 상황이며 건물이 세워질 당시에는 해당 건물들에서 위반 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짚었다. 특히, 폭우로 담벼락이 훼손돼 생존을 위해 축대를 쌓고 건물을 복구하는 상황을 건축법으로 따질 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대법원은 2001년 2월 23일 김풍삼 원장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김 주교에 이어 최 주교도 평신도를 무고한 주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됐다.


▲ 김풍삼 씨 ⓒ 최진


그러나 수원교구의 탄압은 더 심해졌다. 성지 출입로가 교구 사유지라며 굴삭기를 동원해 기도원 출입구를 막았다. 그러나 교구가 사유지라고 주장했던 땅은 원래부터 도로로 사용하던 국유지였다. 이 사실이 드러나서야 교구는 굴삭기를 치웠다. 


또한 미리내 성모성심수도회는 성지를 찾은 신자들에게 ‘대건 기도원이 미리내에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또한 1998년 10월 8일 교구 총대리 최재용 신부는 대건회가 26년간 자신들의 토지를 사용했다며 토지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후 교구는 ‘(가칭)대건 수도원 문제의 올바른 이해와 수원교구의 입장’이란 글을 배포하며 대건 기도원에 대한 비판을 교구 신자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입장문 내용이 사실을 왜곡했고 기도원 창립자에 대한 거짓된 비방을 담고 있어, 명예훼손 혐의 문제가 불거졌다.


교구는 입장문에서 기도원 설립자인 주 막달레나에 대해 ‘주부로서 가정을 떠나 은수 생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변에서 말렸다’고 서술해, 마치 주 씨가 가정을 내팽개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유현석 변호사가 분쟁에 개입하면서 미리내 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2부에서는 미리내 성지 분쟁이 시작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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