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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을 무당으로 만드는 꼴”
  • 최진
  • 등록 2017-11-24 13:50:57
  • 수정 2017-11-27 16: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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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 천주교회는 유명한 사적 계시 사건들로 혼란을 겪었다. 성모님의 발현과 기적, 치유와 예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나왔고 교회는 혼란을 막기 위해 성경과 교리 등 신학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상주 데레사’ 혹은 ‘황 데레사’ 사건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적 계시 사건 중 하나다. 황 데레사는 성모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환시와 예언 등을 했던 사람으로 일부 교회 성직자들과 깊이 연관되면서 90년대 중반까지도 이 논란은 계속됐다.


그렇다면 황 데레사 사건이 미리내 성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황 데레사는 누구인가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에서 보급했던 「황 데레사의 지난 일들」과 「사제 전용-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라는 책에 따르면 황 데레사는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1926년 비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더부살이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으며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황 데레사는 14세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았는데 이를 통해 ‘광채 찬란한 별이 가슴에 안기는’ 등의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가 꿈속에 나타나 천주교 입교를 권유했고 1946년 9월 경북 안동 상주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이후 황 데레사는 세례 후 3일 만에 성모님의 발현과 마귀, 연옥・지옥에 대한 환시 등을 체험하게 된다. 1948년 본당 신부로 부임한 정행만 신부는 황 데레사의 환시 등을 인정했고, 이후 본당 신자들은 황 데레사의 계시와 예언을 믿고 따르게 된다. 이러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면서 신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교구 차원에서 황 데레사의 환시와 예언활동을 조사했고 57년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가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서 대주교는 정행만 신부를 비롯해 황 데레사와 친분을 맺고 있는 신부들에게 그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황 데레사의 계시 활동은 교령에 따라 금지됐다.


그러나 김남수 주교가 수원교구장으로 부임하자, 일체 활동이 중단됐던 황 데레사와 정행만 신부는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에 정착해 수도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황 데레사는 미리내 수도회들을 기반으로 1987년 자신의 사적 계시 내용을 기록한 「황 데레사의 지난 일들」 등 여러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후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가 92년 광주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를 ‘무속적 성격이 강한 신흥종교’로 간주하자, 정행만 신부가 93년 「사목」지 1월호에서 ‘사적 계시와 나의 회고’ 기고문을 통해 황 데레사의 계시와 수도회 설립이 하느님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93년 한 해 동안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를 놓고 교회 내에서 열 띈 논쟁이 벌어졌다.


대건회 탄압은 해묵은 질투심이 기원


1950년대 당시 상주에서는 고행 기도를 하며 은수자로 살았던 주 막달레나(미리내 대건 기도원 설립자)와 성모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예언 행위를 했던 황 데레사가 신자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주 막달레나는 실천적 은수자로, 황 데레사는 사적 계시자로 모두 본당과 교회 안에서 점차 유명해졌다. 


상주에서 교구 수도회 설립을 위해 애쓰던 정행만 신부는 이후 ‘박사 신부’로 신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김남수 신부를 황 데레사에게 소개해 인연을 맺게 한다. 황 데레사는 김남수 신부가 장차 주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예언을 기뻐한 김남수 신부는 이를 계기로 황 데레사를 신뢰하게 된다.


황 데레사는 자신이 성모님을 봤다던 산(일명 성삼산)을 신성시했는데, 이 곳에서 주 막달레나가 고행 기도를 시작하자 탄압해 쫓아버렸다. 쫓겨난 주 막달레나는 1952년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미리내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대녀 고생금 씨와 함께 그곳에 대건 기도원을 설립했다. 


교구장 서정길 주교는 주 막달레나가 실천적 신앙인이라며 수차례 수도회 설립을 권유할 정도로 신뢰했다. 하지만 사적 계시와 환시 등으로 예언 행위를 했던 황 데레사는 신뢰하지 않았다. 특히 사적 계시로 신자들과 금전적 거래가 있었음이 확인되자, 교구 차원에서 활동을 금지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서정길 주교는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 활동을 금지시킨 것뿐 아니라, 정행만 신부와 김남수 신부를 불러 황 데레사와 단절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은 더 이상 황 데레사와 관계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황 데레사 사건으로 한 차례 수난을 겪었던 김남수 신부는 이후 중앙협의회 사무총장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를 거쳐 1974년 10월 5일 수원교구 2대 교구장으로 피명됐다. 교구장이 된 김남수 주교는 대구교구 소속이던 정행만 신부를 수원교구로 불러 수도회 설립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경북 상주에서 시작됐던 주 막달레나와 황 데레사는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그러나 교구장 주교의 막강한 권한으로 인해 이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있었다. 김남수 주교는 곧바로 수도회 설립을 위해 파견했던 대건 기도원 지도신부 임명을 없애고 명도소송을 제기해 노골적으로 대건회를 탄압했다. 


▲ 대건 기도원 땅에 만들어진 미리내 성지 광장. 광장 개발 당시 벌목과 농지 변경 등의 공사가 있었지만, 당시 수원교구는 기도원 측과 상의 없이 성역화 사업을 진행했다. ⓒ 최진


김풍삼 현 대건 기도원장은 수원교구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황 데레사가 수년간 깊이 친분을 맺어왔던 것이 대건 기도원 탄압의 원인이라고 했다. 교구장이 된 김 주교가 미리내 성지를 황 데레사 수도회에 독점으로 내주기 위해 대건 기도원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모친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 온몸으로 고행하며 기도하는 실천가였다. 그러나 황 데레사는 기도는 하지 않고 성모님의 환시를 내세워 사적 계시로 예언 활동을 했다. 결국, 서 대주교가 봤을 때 모친은 실천 신앙인이고 황 데레사는 교회를 위협하는 사적 계시자였다”고 말했다.



“마귀가 라틴말을 했습니다”



1993년 9월 5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빛두레」 111호를 통해 황 데레사의 실체를 교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김 신부는 ‘마귀가 라틴말을 하였습니다’라는 특별기고문에서 당시 미리내 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알렸다. 김 신부가 황 데레사의 실체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김 신부의 모친이 황 데레사를 오랫동안 따르며 그를 보필했기 때문이다.


김승훈 신부는 “6・25전쟁에 휘말리고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와중에 상주에서 ‘성삼은혜’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삼은혜의 골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일찍이 세상에 내린 적이 없는 삼위일체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황 데레사가 성삼은혜로 신자들에게 유명해지자 정행만 신부는 이를 바탕으로 전국에서 신자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박사 신부’로 유명했던 김남수 신부가 여기에 합류하자, 그 위세가 더욱 커졌다. 이때 김승훈 신부의 모친도 상주로 내려가 황 데레사를 보필하게 된다. 


어느 날 황 데레사는 김 신부의 모친을 불러 라틴어로 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적으라고 했는데,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한 황 데레사가 라틴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곧장 김남수 신부에게 향했고, 김 신부는 크게 기뻐한다. 


문제는 다음날 모친이 황 데레사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중 손때가 가득 묻은 라틴어 쪽지를 발견하면서다. ‘손때가 꼬질꼬질 묻을 만큼 힘들게 외운 라틴어를 가지고 하느님의 계시라며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밖에도 성수가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기적소문도 실상은 분홍빛이 조금 도는 물 정도였다. 결국 부풀려진 소문을 듣고 상주로 왔던 많은 이들이 실망해 떠나갔고 결국, 성삼은혜 소문은 서서히 신자들에게 외면 받았다.


지난 45년간 황 데레사는 교회 안에서 너무 대접만 받았다. 신자들은 그 앞에서 꼼짝도 못 했고 그의 말을 하느님 말씀처럼 여겼다. 그러니 점점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협력자들이 그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황 데레사가 기도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어서다. 황 데레사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이미 협력자들 안에서 너무 대접받고 살았다.


증언은 계속됐다. 


황 데레사는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해 천당에 갔다느니, 연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말을 마음대로 하고 다닌다. 심복 수녀들은 이를 부유한 신자들에게 넌지시 전한다. 수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식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면 부모를 위해 엄청난 돈을 낸다.


김승훈 신부는 미리내 수도회에 천만 원 이상 헌납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부 동기에 대한 진의를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이것은 수도회 설립에 앞장섰던 김남수 주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모신심이 관상 보는 신심인가?”



황 데레사의 사적 계시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다. 성모님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특별한 은총을 내린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다. 성모님은 어머니라는 여성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비워냈던 존재론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미리내 수도원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교구 관계자는 황 데레사가 환시 등을 통해 성모를 해석한 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황 데레사가 신자들에게 성모신심을 ‘불쌍한 자녀들을 돌보는 모성애 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토속적 한국 정서에 기댄 잘못된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관계자는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성모님을 해석하니까 성모신심으로 관상까지 보는 사태가 벌어졌다. 성모님이 관상을 본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라며 “이런 잘못된 관점으로 성모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느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신흥 사이비 종교와 같다”고 일갈했다.


이어 “김남수 주교가 교구장이 되니 수원교구는 온통 황 데레사로 도배가 됐다. 미리내 성지를 황 데레사에게 넘긴 것은 김대건 신부님을 무당으로 만드는 꼴이다”라며 “신학박사가 귀했던 시절에 로마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온 신부를 주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고 신뢰를 쏟을 일인가”라고 덧붙였다.


▲ 미리내 성지 내 김대건 신부 묘소 ⓒ 최진


그는 교회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수도회가 설립되면 수도원장과 참사회가 수도회 재산을 함께 관리하면서 수도회를 운영해야 하지만, 미리내 세 수도회 모든 명의가 정 신부로 집중된 점을 지적했다. 수도회 임원도 아니던 정 신부가 여자 수도회 두 곳을 포함해 미리내 수도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창립자 신부가 교회법을 어겼다는 것은 미리내 수도회가 교회법을 무시하면서 운영됐던 것의 근원이 됐다. 미리내 수도회가 사들인 땅을 조사한 결과를 보니 전국에 걸쳐 1,000만 평이다. 미리내 성지에 있어야 할 수도회가 전국에 땅이 왜 필요한가. 이 땅을 살 수 있었던 돈은 어디서 나왔나”라고 덧붙였다.


관계자는 미리내 수도회가 황 데레사를 떠받드는 것 말고도 창립자 정행만 신부도 교주처럼 떠받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리내 수도회가 황 데레사와 정 신부를 모시는 신흥종교 같았다고 회고했다.


“정 신부가 죽으니, 그의 방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려 했다. 조선의 왕들도 방에서 장례를 치른 적이 없고 세계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장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톨릭 수도회라는 곳에서 이런 몰상식한 짓을 했다”라고 일갈했다. 결국 교구가 공문을 내리자 수도원 앞마당으로 무덤을 이동한 것으로 끝났다.


관계자는 대건 기도원 문제와 관련해 “대건회 탄압의 책임은 전적으로 김남수 주교에 있지만, 수도회를 만들어주겠다며 전 재산을 받고도 마무리를 짓지 않았던 윤공희 주교도 문제가 있다”며 “이쯤 되면 대건 기도원 문제는 주교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라고 일갈했다.



▶ 3편에서는 유현석 변호사가 개입하면서 달라진 미리내 성지 분쟁 양상과 수원교구가 2차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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